개자식에 대한 편지에 대한 편지 ┃개자식 레터┃
개자식에 대한 편지에 대한 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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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님!
《친애하는 개자식에게》의 홍보 담당자 A 입니다.
〈개자식 레터〉를 열며 다소 떨리는(!) 마음으로 인사드려요.
저는 이번 레터에서 최대한 솔직한 리뷰와 함께 책을 소개해 보고자 해요. 아무래도 그편이 더 재밌으실 것 같고, 무엇보다 저 또한 한 명의 독자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출간 전 공유 받은 원고를 살펴볼 때, 일종의 블라인드 서평단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고요. 같은 독자로서 여러분의 공감을 얻을 수 있길 바라며… 책을 읽는 과정 중의 감상을 차례로 비교해 보겠습니다!
먼저 원고를 읽기 전, 제가 이해한 주요 인물의 특성은 대략 아래와 같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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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 (여, 50대 배우)
왕년의 톱배우, 하지만 오십 대에 접어들며 이전에 맡던 배역과 칭송받던 아름다움이 영영 멀어져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오스카 (남, 40대 작가)
웬만큼 알려진 작가로, 노동계급 자의식이 강하다. 레베카의 고향 친구 ‘코린’의 남동생. 조에의 미투 고발로 억울하게 성추행 파문에 휩쓸렸다고 생각한다.
조에 (여, 20대 블로거)
레베카의 팬이자 페미니스트 블로거. 오스카 책의 홍보 담당자였으나 그를 미투로 고발한 뒤 블로그에서 폭로를 이어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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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페미니즘 무언가(?) 같은데, 대체 이 세 명으로 어쩐다는 거지?’하는 호기심이 가장 먼저 들었던 것 같아요. 여러분은 어떠셨을까요?
도서 정보를 조금 살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작품은 오스카의 인스타그램 글로 시작됩니다. ‘우연히 본 레베카의 모습이 추하고 참담하더라’라는 식의 내용으로요. 레베카는 그 글을 직접 보게 되고, [친애하는 개자식에게]라는 제목으로 오스카에게 메일을 발송합니다. 이후 작품 속에서 두 사람은 계속 메일을 주고받으며, 조에의 블로그 글도 교차로 서술됩니다. 그 내용은 미투와 페미니즘 외에도 코로나와 계층, 질병, 나이 듦, 중독, 취약함 등 사회의 여러 단면을 아우르고 있어요. 한 단어, 한 갈래로만 설명될 수 없는 복합적 화두가 담긴 소설입니다.
여기까지가 아주 간략한 도서 설명인데요, 점차 원고를 읽어 나가며 든 생각은 우선 ‘밑줄 칠 부분이 매우 많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참고로 저는 어떤 문장을 읽고 여러 질문이 마구 떠오를 때 무조건 밑줄을 치는 편이에요. 제가 밑줄 친 대목을 두 부분만 소개해 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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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1+
‘여러분 가운데 한 분이 질문을 던졌고, 그에 대해 굉장히 진지하게 고민했는데요. 프랑스 힙합과 페미니즘을 같이 즐기는 자신의 취향을 어떻게 조율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떠오른 질문 :
저는 김심야를 즐겨 들었는데(…), 여자 엉덩이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 그 음악을 페미니스트로서 응당 불매하면 될까요? 아니라면 페미니즘 의제에 대한 입장을 그대로 고수하면서 ‘그저 음악’으로서 소비해도 괜찮은 걸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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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2+
‘영화가 나를 향한 권태기에 접어들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영화는 나를 욕망하지 않고, 나 같은 나이와 체격과 특징을 가진 여자 배우와 무얼 해야 할지 모른다는 느낌입니다.’
떠오른 질문 :
영화, 나아가 미디어 전반에서 ‘젊지 않은 여성’을 그려내는 방식은 여전히 제한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다양화할 수 있을까요? 이를테면 영화 <서브스턴스>는 ‘나 같은 여자 배우’와 ‘무얼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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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서는 이렇게 토론 거리로 삼을 만한 날카롭고 지적인 문장들을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이 한국 독자들에게 나이와 성별을 뛰어넘어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한 판의 격렬한 토론이 되어주기를 바란다.’는 옮긴이의 말처럼, 이 책으로 독서 모임을 연다면 분명 아주 재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시에 솔직하게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레베카와 오스카의 이메일이 너무 장황하다고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누가 편지를 이렇게 쓰지…?’ 싶으면서요. 어떤 부분에서는 두 사람이 서로 주고받는 대화를 하기보다 그냥 각자의 일기를 메일로 쓰는 것 같았는데요, 특히 오스카의 편지가 다소 힘들었습니다…
예컨대 ‘저는 왜소합니다. 저로 태어난 게 언제나 우울했죠. 그런 제 인생을 구원한 사람은 스눕 독이었어요.’라는 문장을 보면 어떠신가요? 당시 저는 ‘아니 어쩌라고요…’ 밖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 슬픔과 후회와 자기 연민을 별로 안 듣고 싶은 마음이었나 봅니다. ‘대체 왜 서간 소설로 쓴 거지?!’하면서요.
하지만 작품을 다 읽고 나니, 왜 저자가 편지라는 형식을 사용해서 이러한 구구절절 이야기들을 풀어냈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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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 마주 보는 대화에서는 보통 몇 마디를 뱉고 상대방의 대답이나 반응을 기다리게 되는데요. 사람을 앞에 세워두고 그 사람의 한마디 끼어듦도 허락하지 않은 채로 줄줄이 말하는 건 대체로 바람직한 대화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솔로> 24기를 혹시 보셨을까요? 24기 광수의 말하기가 딱 그런 방식인데, 말을 듣는 상대방의 표정이 정말 좋지 않은 걸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편지를 주고받게 된다면 각 발화자는 나름의 기승전결을 갖춘 ‘글’로 대화하게 되는데요. 앞에 앉은 상대의 표정을 살필 필요도 없고, ‘입 다물어’라는 말을 들을까 긴장하는 일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 풀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휘갈기진 않을 것 같아요. 편지는 뱉으면 사라지는 말과 다르게 ‘보관’이 가능하고, 수신인/발신인이 특정되어 있으니까요. 아무래도 수신인이 한 사람(심지어 일면식이 있는 사람)일 때, 보내면 저장되는 글의 형태로 남을 때 조금이라도 더 조심스러워질 것 같습니다. 편지는 발송 전 수정도 가능하고요.
이러한 편지를 통해 대화하는 레베카와 오스카는 결국 ‘내 맘대로’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아닌, 기묘한 존중 관계에 있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는 완전한 소통도 불통도 아닌 방식으로 각자의(서로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관계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메일을 주고받는 행위 자체로 상대방과의 연결을 더듬더듬 이어갑니다. 읽는 사람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개인적 사연을 마구 늘어놓으면서도, 나름의 방식으로 말을 걸고 상대를 의식하면서요.
이러한 태도는 서로 이해하거나 맞닿을 여지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싶어요. 우선 ‘내 이야기’부터 말하면서도, 상대방의 말을 이해할 수 없거나 듣기 싫더라도 계속 수신과 발신을 멈추지 않는 것. ‘개자식’과의 대화를 이어 나가는 것.
동시에 이는 모두가 꼭 지녀야 할 도덕적 의무는 아니겠지요. 피해자 조에가 가해자 오스카의 사정을 이해할 의무가 없는 것처럼요. 그렇기에 작품 속에서 조에는 편지가 아닌 블로그 글의 형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스카와 조에가 동등한 형식의 발화자로 설정되었다면, 오스카의 가해와 조에의 피해는 마치 ‘각자의 사연’처럼(수많은 성폭력 사례에서 그랬던 것처럼) 보일 위험이 있을 것 같습니다. 《친애하는 개자식에게》는 그런 여지를 없애면서도, 조에의 목소리만 남기는 대신 세 인물의 이야기를 번갈아 보여줍니다.
작품을 다 읽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저는 정말로 이 소설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출퇴근 때 매일 지나가는 헌법재판소 앞 풍경을 생각하면서요. ‘소통 불가’ 같은 단어가 만져질 듯 피부로 와닿는 현시점에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태도를 다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친애하는 개자식에게》가 어떻게 느껴지시나요?
조금 더 알아보고 싶으시다면, 다음 레터를 기대해 주시길 바랍니다!
더 재밌는 것들로 준비할게요.
감사합니다 :)
-비채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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